|

'아힘사'와 국선도
“아힘사”는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운동을 하며 부르짖던 무저항 비폭력 운동이다. 생명을 죽이거나 상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브라만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와 힌두교 계율의 기조가 되고 있다. 이 사상은 간디에 의해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티아 그라하” 운동(비폭력 저항 투쟁)으로 전개 되었다. 간디는 톨스토이와 헨리 소로(Henry Thoreau)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주의 사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고 “무저항 비폭력”이야말로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무저항정신은 후일 미국의 흑인해방운동가 루터 킹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비폭력, 무저항”은 말 그대로 독단과 독선, 그리고 폭력과 강압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적하는 방식이 아니다. 무력은 무력으로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은 무기력한 대응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폭력, 무저항” 자체가 무력을 제압하는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폭력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힘, 즉 자연의 힘이 뒷받침 하고 있는 대응이다. 인위적인 힘이 수반되는 폭력에는 그 끝이 있게 마련이나 무위의 비폭력에는 그 한계가 없다. 간디는 지치는 법이 없는 비폭력을 폭력의 대응책으로 찾아 내었다.
비폭력과 무저항은 물과 바람, 구름, 갓난아이와 같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 능동성이 배제된 "소산적 자연"의 속성들은 수동적 저항을 공통적 특성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아무런 두려움이나 분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화를 내는 법이 없으며, 모든 것과 잘 어울린다. 어울리되 같아지지 않으며 고유한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게 되면[무엇이든 그 한도를 넘어 침범해 오면] 무서운 반응을 보인다. 지나침(過度)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징벌하는, 즉 수동적 저항인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요, 이치이다. 물과 바람, 즉 자연에 대적할 힘은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이러한 비폭력 무저항 사상을 토대로 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중국의 고대 사서에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고조선 인들은 싸움을 싫어하고, 온순하였으며 순박한 심성을 가진 군자지국의 사람들이었다. 동이족(東夷族)은 또한 공자가 부러워하는 군자가 사는 나라, 백의민족의 나라였다. 그러나 중국의 상인들이 들어와 그 물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고대 중국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언제나 침략적 삶이 아닌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흰 옷을 즐겨 입었던 우리 민족, 그래서 백의민족이다. 흰 옷은 무저항을 상징하는 색이며, 단순미의 극치이고 모든 변화 가능성의 기저에 놓여 있는 색, 자연의 바탕색이다.
전통문화의 특성을 계승하고 있는 국선도 수련정신에는 이러한 무저항, 비폭력, 그리고 무위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이 사상은 어느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단군사상으로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해져 오는 고유한 정신문화일 뿐이다. 저항과 폭력은 “나”를 앞세우는 개인주의의 서양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을 앞세우는 문화는 언제나 힘을 소중히 여기며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서구적 건강문화인 헬스는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국선도 수련은 힘을 양생하는 일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개아(個我)의 힘을 적극적으로 기르기 위한 데에 궁극적 목적이 있지 않다. 국선도는 기본적으로 힘을 빼고 비움으로써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연의 힘을 내재적으로 갖게 되는 그러한 수련법이다. 따라서 내재적인 능력을 과시하거나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한 수련은 국선도 수련 목적과 거리가 있다.
국선도는 소아를 넘어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