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 넘어서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기억력 감퇴란, 자연이 인간에게 세상을 하직하게 하기 위해 준비를 시키는 첫 작업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이러저러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많은 파란만장한 삶의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죽으면 한 순간 사라지는 몸을 위해 숱한 날들을 얼굴 치장하고 옷맵시 뽐내며 가꾸던 일에서부터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날밤을 지세우던 일들, 사랑 때문에 뒤집혀진 속을 달래며 오랜 세월 맘고생 하던 일,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한푼두푼 돈모아 내집 마련하고 애도 낳고 오손도손 잘 살기 위해 피땀흘려 평생을 고생하던 수많은 날들 ...
사소한 일로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타투고 속 상해하면서, 몇날 며칠을 삭히지 못한 분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던 시간들...
조건 없이 날 아껴주었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던 잊지 못할 나의 은사님,
피를 나눈 나의 형제들, 그리고 내 가족들 ... 사랑했던 이들...
떼놓고 떠나기 싫은 금쪽같은 내 아이들 ...
그리고 ... 너무도 아끼던 물건들 ... 맛있게 먹던 육개장과 남원 추어탕... ㅠ..
이러한 모든 기억들로부터 서서히 해방되어야
세상을 편히 떠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깜빡깜빡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에는,
“아, 이제 갈 날을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때가 왔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둘 우리 마음을 붙들고 있는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정리하고,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라, 빈손으로 와서 무엇을 들고 갈 것입니까?
모든 기억과 생각도 이 세상에 태어나 얻고 만든 것이라면, 이 또한 내려놓고 가야겠지요. 아까운 것들 너무도 많지만 모두 놓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오래 가는 것 없고, 없어지지 않는 것 없으니 이러한 諸行無常의 이치를 그 누가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잘 내려놓고 가기 위해서는 하직을 하는 그 날까지 건강해야만 합니다.
제 정신을 잃고 세상 떠나는 사람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떠날 수 없습니다.
미련과 모든 기억을 지워야 비로소 자유로운 여행을 다시 떠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무거우면 여행을 떠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맑고 밝은 그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겠지요. 그래서 구천을 맴도는 영혼이 있는 것이겠지요.
망각은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마지막 선물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