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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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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큰 꿈과 한숨
등록자 두 께 등록일 2008-05-29 08:55



[33호] 큰 꿈과 한숨




 

2005.04.27 11:18

http://paper.cyworld.com/interunits/595033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케일이 큰 민족이 아닌가 싶다.

작은 나라지만 나라 이름부터가 큰 大자가 들어간 대~한 민국이다. 요즘은 좀 세태가 달라져서 대답이 옛날과는 다르겠지만, 아이들한테 “너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겨야?”리고 물으면, 십중팔구가 대통령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큰 꿈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부모들이 틈틈이 애들 마음속에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보다 더 비좁은 땅덩어리에서 살면서도 어울리지 않게 큰 평수의 아파트를 고집하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지만, 큰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집주소를 쓸 때에도, 먼저 거창한 대한민국이 나오고 그 다음 나머지 특별시, 무슨 구, 무슨 동... 번지가 뒤따른다. 어디 주소뿐이겠는가? 거스름돈을 줄 때에도 큰 돈 먼저 주고 나머지 거스름돈을 주는 것이 순서로 되어 있다. 식사를 하더라도 침을 섞어 함께 먹는 그러한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음식의 네 몫, 내 몫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지 않은채, 서로 눈치를 보거나 양보하거나, 아니면 다투면서 밥을 먹는다.

이렇게 한국의 전통문화는“나”라는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 “우리”나 “가족” 등 집단과 공동체 의식이 개인의 가치에 우선한다. 따라서 확립된 개인의식을 토대로 형성된 공동체 의식의 강조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혹독한 IMF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너무 작은 나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큰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일까? 서구인들의 의식과는 참으로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주소를 적는다. 아주 구체적인 동 호수에서 시작하여 나라 이름으로 끝으로 써 내려간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저마다 자기 몫이 분명히 있다. 네 것 내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법과 규범을 의미하는 "nomos"란 말은 원래 그리스 언어 Νομέω라는 동사, 즉 "나누어주다", "할당하다"라는 뜻에서 부터 나왔다. 영어의 경제를 의미하는 economy란, oikos(집) + nomos(할당), 식탁에서 가족 성원에게 음식 분배가 고루 잘 이루어지는 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이란 한 마디로 각 개인의 몫을 공정하게 나누어 주는데 있다는 의미다. 분배 정의의 실현이 법인 셈이다.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에도 동전을 먼저 내주고, 그 다음 지폐, 그리고 마지막에 큰 단위의 돈을 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해 본 분들은 모두가 경험한 일이겠는데, 유럽이나 호주,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서양인들은 아주 다양한 동전을 작은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많은 종류의 동전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경우는 어떠한가? 동전이라야 10원, 50원, 100원 짜리, 그리고 500원 짜리 동전 네 종류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10원과 50원짜리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다. 고작 시중에서 사용하는 것은 100원과 500원짜리 동전 두 종류뿐이다. 애들도 동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동남아, 미주를 여행하는 한국 여행객들은 큰 돈을 그것도 현금으로 잘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노상강도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진정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사 작은 것, 개인, 단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큰 것만을 추구하는 스케일이 큰, 허세 많은 그러한 민족인가?

다행스럽게도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듯싶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지적할 때마다, 학자들은 동양의 직관(直觀)과 서양의 추상(抽象)을 말한다. 직관적 사고의 특성은 부분 보다는 전체를, 경험이나 추리·판단 따위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하겠고, 반면에 추상은 구체적 사물에서 공통되는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관념적으로 뽑아내는 이성적인 사유 능력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전체를 먼저 파악하고 난 연후에 부분적인 데에 관심을 갖는 그런 경향이 현실적 사고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분 보다는 전체에, 나무보다는 숲에 먼저 눈을 돌리는 경향이 문화적인 덕목과 특성으로 자리매김 해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은 숲을 바라다보는 개인, 즉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의식정립이 소홀한 상태에서 인간과 자연의 합일, 조화가 강조되어 온 것이 그 특색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구루의 나무 보다는 숲을”, “한 개인 보다는 집단을”, “소박한 꿈보다는 큰 꿈과 야망을”, “작은 웅덩이 보다는 큰 강을” 먼저 보고 중시하는 우리의 사고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고 내실을 기하지 않으므로 생기는, 허영의 환상이 창출하는 위험의 요소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병폐 가운데 하나인 “한탕주의와 한건주의”, “굵고 짧게 살자”는 식의 무모한 사고는 모두 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작용인 셈이다. 그 결과로 삼풍참사와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더 나아가서, 마땅히 밟아야 할 하나하나의 작은 절차와 과정들을 무시하고 법 테두리를 넘어서 무력으로, 사기와 술수, 권력과 금력, 공권력을 남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함으로써 한동안 우리는 독재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보낼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지금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서구인들의 사고가 어떠고 저쩌고 하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살피다가 이런 저런 생각을 연관시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단전호흡을 오래 하였으나, 때 늦게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반성문 아닌 반성의 글을 지금 스스로에게 쓰고 있다. 수련을 잘 못 하게 된 것은 내가 수련했던 국선도 시스템이 잘 못 되었던 것도 아니고, 나를 지도해 주신 사범님이 잘 못 가르쳐서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하고 싶다. 전적으로 내 욕심에 기인하였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는 선배나 사범님들이 한결같이 “욕심을 버리고 수련을 하십시오.”라는 충고를 해 주었지만,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누가 그걸 모르냐?”로 일관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방식대로 내가 알아서 한다.”는 오만을 가지고 수련 목표를 세웠고 호흡 수련의 “큰 꿈”을 세웠다.

그러나 내 호흡 수련의 “큰 꿈”은 “큰 숨”(한숨)으로 바뀌어 제자리를 맴돌고 말았다. 나는 내 호흡 수련의 일차 목표를 임동맥 유통에 두었고 이를 위해 단열을 o 개월 내에 느끼고, 축기를 열심히 하고 단전을 강화시켜 불씨를 단전에 자리 잡게 하는 세부 일정을 수립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을 혼자 재미있게 머릿속으로 행한 것이다. 나는 단전호흡이 등반하는 사람이 산 정상을 정복하는 일이나, 재산을 불리는 일, 또는 학위를 취득하는 일과 다른 유형의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호흡은 무언가를 애를 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不用求眞이라, "구하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호흡이란 욕심 없이 작은 숨부터 차분히 쉬다보면, 그 작은 숨, 하나하나가 가늘고, 부드럽고, 길고, 깊게 이어지면서 참 호흡을 할 수 있게 되는 이치를 때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불씨에 눈이 어두워 작은 호흡으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큰 호흡만 하려고 자맥질을 하였던 것이다.

한탕주의를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비난하던 내 자신 속에도, 한탕주의는 분명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정을 무시하고 “큰 꿈” 달성에 마음을 빼앗긴 욕심 많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한숨”말고 무엇이 또 있겠는가? 큰 것을 얻고자 하면 응당,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았어야 했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10원 짜리 동전, 버리는 자투리 시간, 작은 관심, 작은 호흡.... 등 작은 것의 귀함을 절실히 알고 느끼는 데에서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한 것을... 늦었지만 그렇게 늦지는 않았기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시작을 하려고 한다. 작은 것이 더 없이 아름답고, 더 없이 고귀하게 내게 다가와 느낄 수 있게 될 때, 이에 수반되는 부산물로 언젠가는 以小成大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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